대한민국의 건국과 하나님의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정체성

작성일 : 19.05.24 15:13 | 조회 : 119
  1.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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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은 이 땅 한반도에서 일어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큰 희생을 치른 전쟁이었다. 남북한 군인과 수많은 민간인, 그리고 참전한 다른 나라 군인까지 포함하여 600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기간과 규모를 감안한다면 2차 세계대전보다도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다. 6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이 전쟁의 상처와 분단으로 고통 받고 아픔과 상처를 안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편 이러한 고통과 희생의 이면에는 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자유대한민국의 탄생을 가져온 시작과 동인이 된 부분이 있다.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고 교회사와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6.25전쟁이야말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내고 정체성을 확립한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고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1948년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세워지면서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살고 있었던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정체성 속에 있었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국민으로서 국가의 정체성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경험이 된다. 6.25전쟁 이전에는 남이나 북이나 여전히 같은 조선이었다. 하지만 생명이 오가는 전장에서 같은 조선인이라는 생각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적과 동지로 편이 나누어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현실과 경험은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뭉쳐야하고 적은 물리쳐야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고 적은 공산주의 집단이었다. 전쟁으로 북한과 공산주의 더 이상 한민족이 아니라 적으로 느끼는 배타성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적군이 분명해짐으로써 아군의 응집력 또한 강화시켰다. 6.25 전쟁 이전까지 남북한의 체제대결에 냉소적 지식인이었던 역사학자 김성칠은 공산주의 점령 하에 서울에서의 생활을 아래와 같이 일기로 기록하였다.

     

    195075일 명륜동에서 벌어진 한 인민재판의 이야기

    그저께 마을에서 반을 통하여 한 집에 한 사람씩 성균관 앞으로 오이라기에 나가 보았더니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 놓고 따발총을 맨 인민군들이 군중을 향하여 이 사람이 반동분자요 아니요?”하고 물으매, 모두들 기가 질려서 아무 말이 없는데 그 중에 한두 사람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들을 적발한 사람인 듯악질 반동분자요하고 소리치니 두말없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 죽이는데, 그 피를 뿜으면서 버둥거리다 숨지는 양이 보기에 하도 징그러워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리었다. 그 죽은 청년들이 어떤 반동 행위를 했는지 군중들은 알지도 못한 채.

    195092: 서울 이외의 방송이 들인다기에 시험 삼아 틀어보았더니, 대한민국 방송도 들리고 일본 방송도 나온다. 진작 이런 줄 알았더라면 하고 아내와 더불어 호젓이 웃어보기도 한다. “자유의 소리, 대한민국의 방송입니다.”하는 대목에 울컥하고 목이 메어짐은 어인 까닭일까. 언제 내가 대한민국에 이처럼 마음을 붙이었던가? “공산 세계에 머무는 여러분, 여러분은 군사 시설에 가까이 가지 마시고 부디 살아남아서 좋은 세월을 맞이합시다.” 하는 소리에 아내와 손을 맞잡고 울었다. 내가 퍽은 감상적이 되었나보다.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6.25 전쟁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민주주의를 내세운 공산주의자들의 해괴한 인민재판과 조국통일을 내세운 처참한 살육을 몸소 겪으면서 이 나라 백성들은 확고한 노선과 의식을 가진 국민이 되었다. 전쟁은 비극이었지만 비극 속에 희망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정체성을 지닌, 국민의 탄생이었다. 그 국민들이 공산군을 물리치고 자유를 수호하고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루어내 발자취가 우리 현대사이다.

     

    한국전쟁과 대한민국의 발전

    로마서 8장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핵심적 노하우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간섭의 은혜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선한 뜻을 모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한국경제 논설위원을 지낸 정규재 주필은 6.25에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성공 이끌었다. 김일성 체제가 들어선 이후 150만 명이 북에서 월남하고, 10~15만 명 정도의 인구가 남에서 월북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그렇게 거대 인구가 올라가고 내려왔다. 비율로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사람의 수가 월북한 사람보다 10배가 넘는다. 김일성의 등장과 전쟁의 와중에 북한에서 거대한 인구가 내려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식층, 지주, 유산자, 기술자, 기독교인 들이었다. 특히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이후 남한에서 보수교단을 설립함으로써 한국의 기독교를 리드해갔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기독교도들과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대거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탈출했다. 해방 당시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에 해당하는 20여만 명 이상의 신자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에 살았고 이들은 김일성과 대척점에서 종교의 자유를 놓고 싸웠다.

    이들은 어떤 면에서건 개화된 인구들이었고 서구의 세계관에 익숙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노예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의 표현으로 생각했기에 적극 수용하는 그런 신인류였다. 6.25 이후 이들이 대한민국 거리에 넘쳐났다. 거대한 이민 인구가 낡은 대륙에서 미국 뉴욕의 거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이민의 국가 미국에서나 나타나는 그런 광경이었다. 이 같은 인구의 거대한 이동은 그 자체로 북한의 인구격감을 만들어 냈다. 6.25이후 북한에서는 인구의 절멸 현상이 나타났다. 1945년 해방 후 남한의 인구는 2천만 명, 북한의 인구를 1천만 명으로 추산한다. 북한 전체 인구의 거의 10% 내지 15%에 가까운 인구가 남한으로 탈출한 것이며 그것도 지식인 자산가 기독교인이라는 근대화된 인구집단의 대탈출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북한 사회의 퇴행적 현상은 바로 인재의 기근, 인구의 격감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람만큼 사회의 성장발전에 필수적인 것은 없다. 아니 사람이 바로 발전 그 자체다. 일제 시대와 해방 이후 근대화된 대규모 산업시설은 모두 북한에 있었다. 이것은 그러한 기술을 가진 지식인과 기술자들이 모두 북한에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일제는 상대적으로 평야지대가 많은 남한은 농업을 주산업으로 육성하였다. 남한에는 상대적으로 근대 신기술과 신문명을 접한 지식인들이 적었다. 대한민국엔 지력의 폭발이 북한에는 지력의 고갈이 나타났다. 이것이 동족이던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였고 동인이었다.”

     

    한미동맹은 곧 복음동맹

    한국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고 장기화되면서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한국전쟁에 말려들어 자기나라 군인만 5만 명 이상이 죽었고 엄청난 지원과 물자를 계속해서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은 가능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늪이었고 진창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트루먼 대통령의 인기는 날로 떨어졌고 대신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2차 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였다. 미국인들은 2차 세계대전도 끝낸 그였기 때문에 한국전쟁 정도는 얼마든지 끝낼 거라고 믿었다.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에 박차를 가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은 휴전협정에 강하게 반발하여 두 개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첫 번째는 북진 통일론이었고, 두 번째는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이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무력으로 북진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기 미국의 협의 없이 단독으로 27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이승만의 주장은 전쟁을 일으킨 것은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며 많은 북한 젊은이들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강제로 끌려와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쟁을 통하여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깨닫고 반공노선으로 돌아서 북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한국의 안전은 보장되었고 1954년 합의 의사록으로 군사 및 경제면에서 대규모 지원이 확정되었다. 한국은 전후 필요한 경제지원과 함께 한국군을 72만명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군사 원조도 받았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한미동맹으로 대한민국이 받은 혜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첫째로 한반도 및 구주면 지역에 장기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다. 6.25 전까지 한반도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한미동맹 이후 단 한 번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로 미국의 확고한 방위에 힘입어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미국의 주둔과 지원으로 국방비 부담을 줄이고 60~70년대 경제개발 우선정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셋째로 한국은 군사강국이 될 수 있었다. 한미동맹으로 20개 사단이 현대화되었고 70만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넷째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다섯째로 한국에 문명사적 대전환과 개방을 가져왔다. 한국은 5천 년 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있었다. 미국과의 우호적인 교류는 폐쇄적인 문화와 사상에서 벗어나 한국의 모든 분야의 개방을 촉진했다. 한국은 과거 은둔자였던 나라에서 5대양 6대주를 누비를 글로벌 국가로 성장했다. 여섯째로 한국의 기독교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폐허가 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함께 많은 민간의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졌는데 주로 기독교단체와 교회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적교류, 물적 교류가 이루어지며 한국 교회의 성장과 기독교인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다. 해방 전 남북한을 합친 전체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 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에는 기독교 교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1950년에 이르러 그 수가 60만 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무려 16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은인의 나라 구원자의 나라가 되었고, 한미동맹은 곧 기독교 동맹이자 복음동맹이 된 것이다. 한미동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맹으로 평가 받는다. 이는 건국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 최고의 천재인 이승만의 혜안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이며, 하나님의 역사요 대한민국을 향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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