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건국과하나님의역사 (3)

작성일 : 19.04.26 15:32 | 조회 : 84
  1.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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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비밀 특사와 유학 시절

    1904년 만주와 한반도이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러일 전쟁의 승자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정부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해결책은 1882년 서양과 최초로 조미수호조약을 맺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민영환과 이승만의 출옥을 도운 한규설은 비밀리에 미국에 특사를 보내기로 거론하고 이승만을 지목하였다. 역적이었던 이승만이 갑자기 국운이 걸린 중대사를 떠맡게 된 것은 탁월한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웠지만 감옥에서 그의 영어실력은 더욱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190411월 이승만은 조선에 호의적이라고 알려진 딘스모어 의원에게 보내는 정부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조미수호조약을 맺긴 했지만 이에 대한 조선과 미국의 입장은 달랐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것처럼 유사시에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미국은 조약을 맺었다 해도 자신의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국제관계의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190510월자 <Outlook>지에는 이승만이 찾아갔던 루즈벨트의 동료였던 조지 케넌이 조선에 대해 쓴 글이 실렸다. “육체적, 지적, 도의적인 특징을 포함하여 조선에 대한 우리의 첫인상은 굳어버리고 조선인에 대한 우리의 불신감은 하나이 신념처럼 되어버린다. 그들은 기울어진 동양 문명의 녹슨 소산물이다. 조선 정부의 실태는 국민들로부터 그들이 간신히 생계를 위하여 벌어들이는 모든 것은 직간접으로 수탈한다. 생명과 재산에 대한 아무런 보호책도 제공되지 않는다. 눈에 뜨일만한 아무런 교육 시설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도로의 청소와 위생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전염병의 예방이나 단속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는 노력도 없다. 가장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있다. 인권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거짓과 부정과 배신과 잔인성과 세상을 비웃는 만행을 본보기로 국민에게 보임으로써 그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문란시키고 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조선에게 불리했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영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었고 미국도 역시 같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발전상에 매료되어 있었고, 조선의 후진성에 대해서는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를 억제하기 위해일본이 한반도를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19057월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고,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서로 합의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결국 대한제국 특사로서의 이승만의 활동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일과 경험은 훗날 외교의 신으로 불린 이승만을 탄생시킨 중요한 교훈과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이 과정을 통해 힘없는 약소국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과 강대국의 논리를 파악하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공사였던 김윤정의 배신과 나라에 대한 배반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이 그처럼 저열한 상태에 빠져있는 한 한국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기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처음 선택한 학교는 조지 워싱턴 대학이었다. 그는 이미 미국에 오기 전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입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아 두었는데 그것이 열아홉 통이나 되었다. 이승만은 장차 기독교 교역자가 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여 목회 장학금을 받았고, 학업과 함께 미국 교회와 YMCA에서 한국 선교와 독립에 대한 강연을 170여 회나 했다. 배재학당에서의 수업을 인정받아 2년 만에 학부과정을 마치고 하버드 대학교에 편입신청서를 냈다. 신청서내용은 내가 한국에 돌아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으므로 2년 안에 박사학위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이승만의 예사롭지 않을 경력을 높이 사서 입학이 허락되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하버드에 입학했으나 기독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학교분위기에 실망하여 학교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때 우연히 서울에서 알던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 열정이 강한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직접 이승만을 프린스턴 대학원장에게 데려가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고 미래한국 기독교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울 것이라고 소개했다. 프린스턴 시절은 유학 생활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당시 프린스턴 총장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이었다. 윌슨은 이승만을 아꼈고 그의 집에 초청하여 가족들과도 가까이 지낼 만큼 친분을 쌓았다. 그는 실제로 2년 만에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미국의 명문대에서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단 5년 만에 마치는 진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20106월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면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은 그에게 찾아온 것은 기쁨보다는 나라를 잃은 슬픔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며 조국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YMCA 활동과 하와이 망명

    조선으로 돌아온 이승만은YMCA의 총무로 취임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교회에서 설교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백만인 구령 활동에도 참여했다. 오늘날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한반도전역에 YMCA를 조직하고 기독교 교육 사역에 열중했다. 이무렵 이승만은 훗날 대한민국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많은 인물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총독부는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독립운동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탄압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총독부를 자극했다. 이에 조선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191111월 기독교인들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여 700여명을 검거했다. 고문 과정에서 3명이 사망했고 105명이 구속되었다. 이승만도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미국 선교사들이 개입하여 체포를 면했다. 그들은 총독부 측에 미국 교계에서 상당히 잘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말썽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단 구속은 면했지만 한국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했다. 주한 선교사들과 감리교 목회자들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1912년 기독교 감리회 총회에 이승만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세계감리교 대회 이후 이승만은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제일 먼저 한 것이 저술이었는데 일제의 탄압과 한국교회의 핍박에 대해 쓴 명저 <한국교회의 핍박>이 탄생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 중에 사역을 이루셨고 사도들은 핍박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으며, 마찬가지로 한국교회 역시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가라는 비전을 성취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아시아를 선교하고 일본과 중국을 기독교로 인도하리라고 내다보았다. 이승만은 장차 한국교회가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집필을 마친 이승만은 하와이전체를 구석구석 순방하며 4천여 교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목격했다. 이승만은 순방도중 학교도 못 다니고 중국인이나 본토인에게 팔려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소녀들을 많이 만났다. 이중 6명을 데리고 와서 가르치며 하와이에서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은 한인 중앙학원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당시로는 혁명적인 교육방법을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남녀공학 제도였다. 원장으로 취임하자 19명의 여학생들이 공부하겠다고 모여 들었는데 이승만은 그들을 위하여 기숙사를 마련하고 남학생과 함께 공부를 가르쳤다. 한인 중앙학원의 뒤를 이어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에서 네 가지 교육지침을 표방했다. 1) 교육과 기독교 지향의 학생활동 2)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 3) 젊은이들의 지도력 향샹 4) 사회교육의 추진 이승만은 기독교 정신에 투철한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고 성경공부를 강조했다.

    임시정부 대통령, 친미 외교와 반공 노선

    191931운동 이후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중 가장 실제적인 활동을 펼쳤던 세 곳에서 이승만을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다. 노령의 대한 국민의회 국무총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정부 지정관 총재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지만 모든 망명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받든 것이다. 한성, 노령, 상해 임시정부는 결국 하나로 합쳐져서 19199월 통합 상해임시정부가 되었고, 초대 임시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선택한 독립방법은 외교노선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무장투쟁의 한계이고 둘째는 국제 정세를 읽는 이승만의 안목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인의 자력에 의한 일본과의 정면대결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소모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0세기 초반 일본은 전 세계 3대 강국중의 하나였고 8천 만 명의 국민 중 군인이 700만 명을 차지했다. 그리고 일제시대 조선광복군이 가장 번성했을 때 수는 46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일찍부터 일본과 미국의 충돌을 예상하고 친미 외교노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유일한 길이자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의 친미 외교노선은 임시정부 총리였던 이동휘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임시정부 내에 사회주의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정부가 세워졌다. 이때 전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이상에 열광하며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순간부터 반공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는 공산주의를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해 가며 국민을 노예로 만들고 지배하려는 사상 체계라고 간주하고 공산주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공산주의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토록 일찍 공산주의를 꿰뚫어 보고강경하게 반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승만이 성경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진리에 정통한 사람은 거짓에 속지 않고,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어두움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이승만은 논설에서 모든 부자의 돈을 합하여다가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면 부자의 양반 노릇하는 폐단은 막히려니와, 기업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어려우리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묘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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